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7년 외환 위기 (문단 편집) === 장애물에 직면하다 === 1990년대 중반부터 위기 바로 전년도까지만 해도 선진국으로부터 기간은 12개월 이내의 단기면서 이율은 저이율인 외채를 끌어들여 [[롤오버]]로 연장해 가면서 그 돈을 다시 동남아시아 금융시장에 장기 고이율로 대주는 방식으로 따로 드는 돈도 필요없이 그야말로 앉아서 돈을 쓸어담으며 떼돈을 벌었던 [[종합금융회사]](약칭 '''종금사''')들과 [[OECD]]에 29번째로 가입해 '''선진국 클럽에 합류한 한국의 위상 문제''', 그리고 12월에 실시하는 대통령 선거가 발목을 잡게 되었다. 1. 90년대에 들어 무려 '''30여 개'''로 난립한 [[종금사]]들이 일본 등지에서 1년 이하 '''단기 외채'''로 끌어들인 돈을 다시 '''장기채권'''으로 빌려주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상황이 점점 나빠져서 불량채권이 늘어나게 되었고 미국의 금리인상 여파로[* [[앨런 그린스펀]] 미국 연장준비제도([[FRB]]) 의장이 본인 업무 스타일대로, 사전에 금리 인상 필요성과 가능성을 시장에 예고한 바 있으나 실제 금리인상 조치 여파는 대한민국 전문가들의 예측보다 더 컸다고 한다.] 아시아 국가들에 투자된 자금 일부가 다시 미국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한국의 종금사들도 12월, 1 ~ 2월인 채권 만기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. 1. 1996년 [[BIS]] 자기자본비율의 도입으로 일본 은행들이 한국에 빌려준 부채를 회수하기 시작했다. 1. 1994년에 수출 1,000억 달러를 돌파하고 1995년에는 마침내 선진국의 기준처럼 여겨진 국민소득 10,000달러까지 도달한 문민정부의 경제성과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. 1. 게다가 1996년 총선의 압승으로 여권 단독 표결로 통과시킬 수 있는 각종 개혁 입법들마저도 정권 말 지지도가 급락한[* 전년도 연말에 벌어진 [[1996년 노동법 날치기|노동법/안기부법 날치기]]와 아들 [[김현철(1959)|김현철]]의 비선실세 국정농단 스캔들이 치명적이었다. 아들의 스캔들 이후 [[https://www.hankookilbo.com/News/Read/201611012026708926|극심한 레임덕으로 식물대통령 상태였다]]는 분석도 있다.] '''YS와 거리를 두려는 여당'''의원들의 비협조로 통과하지 못하였다. 표결에 다수가 불참했다고 한다. 이 때문에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 10월과 11월 사이 정부는 환율 급등을 막기 위해 118억 달러를 외환시장에 쏟아부었으나 해외시장에서 한국의 대외신인도를 다시 끌어올리지 못하고 [[무디스]] 등지의 신용평가회사들의 평점은 계속 하락하는 악재가 연이어 발생했다. 이 와중에 대외부채상환용 외환마저 모두 다 써버려서 추후 있는 외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. 앞서 말한 300억 달러 유지는 사실상 11월을 지나면서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전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